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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 속에 민족의 염원을 품고 있는 곳

기사승인 2019.07.26  1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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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현재, 미래를 좇아 연해주에 가다

안중근 단지 동맹비

무명지가 잘린 손도장 위로 조심스레 왼손을 갖다 대 본다. 

2011년 8월 4일 
102년이 지난 오늘 
12人을 기억하다

비문이 적힌 기념비를 지나 길처럼 이어진 기념석을 따라 걷는다. 
기념석 하나하나에 숫자가 적혀있다. 
1990, 1980, 1970, 1960, 1950, 1940, 1930, 1920, 1910. 
어느 새 우뚝 솟은 또 다른 기념비 앞이다. 
역시 잘린 손가락에서 핏방울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손도장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1909년 3월 5일경
12人이 모이다 1)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외로이 서 있는 안중근 단지 동맹비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연해주 연추 마을에 모여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동맹을 결의했다.


약 110년이 흐른 지금, 이들의 염원은 이루어졌을까. 
시간을 거스르는 기념석 끝에서 마주한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우리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를 좇아 보았다.

 

굶주림과 폭정을 피해 두만강을 건넌 이들

고려인, 까레이스키, 카레이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우리 민족을 부르는 말이다.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굶주림과 폭정을 피해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 13가구가 연해주(프리모르스키) 포시에트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지신허에 최초로 마을을 이뤘고, 이후 연해주를 비롯한 곳곳에 한인 사회를 형성했다. 이 마을들은 1937년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기 전까지 항일의병운동의 중심지였고, 해외 독립 운동가들의 근거지였다. 

한인들이 최초로 도착한 포시에트항. 한인들은 이곳을 목허우라고 불렀다. 이곳은 현재 시베리아 석탄을 실어 나르는 열차의 중간 기착지다.


구한 말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강탈당하자, 연해주 각지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났다. 2년 뒤 일본은 헤이그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고, 조선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국내 활동이 더욱 어려워진 민족운동가들은 망명을 단행했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는 주된 망명지 가운데 하나였다. 

러시아 한인들은 1905년부터 1908년까지 크라스키노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1908년 한 해에만 연해주에서 총 69,804명의 의병이 1,451차례 무장출동 했다. 최재형, 이범윤, 유인석, 안중근 등이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1908년 4월, 크라스키노의 최재형 집에서 동의회(同義會)가 결성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두만강과 접해있는 러시아 최남단 하산에서 국내진공작전이 전개되었다. 7월 19일 회령 영산에서 일본군에게 패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은 좌절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09년 2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러시아 한인들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도 활발히 펼쳤다. 한민학교 등 11개 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했고, <대동공보>, <해조신문> 등 신문을 발행해 국내외 소식을 전했다.   


8,624명이 서명한 한일합방 무효 선언서

1910년 6월에는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등이 주축이 되어 연해주 의군 세력을 하나로 통합해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했다. 십삼도의군에는 의병 계열뿐 아니라,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신민회(新民會)의 주요 간부 안창호, 이갑 등도 참여해, 국내외 항일세력의 규합을 시도했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국권을 상실했다. 이보다 앞선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신문을 통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것이란 비보가 전해지자, 러시아 한인들은 그 길로 한인학교에 집결했다. 십삼도의군의 중심인물들이 주도해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방 무효를 선언했다. 각국 정부에 이상설이 초안을 작성하고 유인석이 보완한 합병 무효 선언서도 보냈다. 그 해 10월 미국무부장관 앞으로 도착한 ‘성명회 선언서’에는 연해주 각지로 망명한 의병과 애국계몽운동가, 그리고 연해주 현지 한인사회 지도자 8,624명이 참여한 112장의 서명록이 첨부되어 있다. 
 

러시아 이주 50주년, 독립전쟁을 도모하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잃었다. 1911년 5월, 러시아 한인들은 이종호, 김익용, 강택희, 엄인섭 등이 중심이 되어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했다. 초대회장에는 최재형, 부회장에는 홍범도가 선임되었다. 이름만 보면 순수한 경제단체 같지만 목적은 러시아 한인의 권익옹호와 조국의 독립이었다. 1912년 4월에는 권업회의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창간했다. 주필은 신채호였고, 이상설, 장도빈 등이 활동했다. 

권업회는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해 1913년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해 운영했다. 그리고 시베리아, 만주, 미주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을 모아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을 구상했다. 1914년 러시아에서는 러일전쟁(1904. 2. 8. - 1905. 9. 5) 10주년을 맞아 러시아와 일본이 다시 전쟁을 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인들은 권업회의 주도로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이상설, 부통령에 이동휘를 선출했다.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한 1914년은 한인들에게 러시아 이주 5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국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했지만, 그 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일본과 공동방위체제를 확립한 러시아 정부가 한인의 모든 정치·사회 활동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의 모체가 된 권업회는 그 해 6월 해산 당했고, 대한광복군정부도 9월에 해체되었다. 권업신문 역시 9월에 발행금지 되었다.  

‘동쪽을 정복한다’라는 이름을 가진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이자 공업, 교통, 문화의 도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 항일운동을 이끌던 곳이었다.1874년 한인들이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한 개척리.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지에 자리 잡은 이곳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국권회복운동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 항일언론기관인 해조신문사와 대동공보사가 설립되었고, 경술국치 전에 한일합방 무효를 선언한 성명회가 조직되었다.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전염병 근절을 핑계로 개척리를 강제 철거하고 이 일대를 기병부대의 병영지로 삼자, 러시아 한인들은 신한촌(신개척리)을 건설했다. 건업회의 근거지였던 신한촌은 1911년부터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기까지 러시아 지역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1919년 한민학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불붙은 곳이었고,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등 수많은 항일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된 곳이었다.

 

국내외 최초의 임시정부 수립과 러시아의 3.1운동

권업회의 전통은 1917년 러시아혁명 발발 이후 조직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로 이어졌다.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한인대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전로한족회 대표자회의’ 결과 조직되었다. 본부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는 등 국제 정세가 새롭게 전개되자,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1919년 3월 17일(2월 25일이라는 견해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체제인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개편했다. 의장에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 그리고 각계각층의 지도자 70~80명을 의원으로 선출했으며, 대한민국의 독립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혈전 결의를 선포했다. 또 별도의 행정부를 조직해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 탁지총장에 윤현진, 군무총장에 이동휘, 내무총장에 안창호, 산업총장에 남형우, 참모총장에 유동열을 추대했다. 그리고 이 같은 대한국민의회의 성립을 각국 영사관에 통보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국민의회는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러시아 한인들은 우수리스크를 시작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 등 여러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대한국민의회는 군자금을 모금하고 무기를 조달해 독립군을 조직·훈련시켰으며, 국내진입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대한국민의회에 이어 상해(4. 11)와 한성(4.23)에서 각각 임시정부가 결성되자, 세 단체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임시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두며, 임시의정원과 합병해 의회를 조직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2019년 8월 해산을 결의했다. 그 해 9월 상해에서 개헌 형식으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동휘, 최재형, 문창범 등이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그 중 이동휘는 상해로 이동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러시아 한인들은 다양한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해 대일투쟁을 벌였다. 그 중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 단원 강우규 의사는 1919년 9월 남대문역에서 신임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를 경악케 했다.

 

신한촌을 피로 물들인 4월참변

1920년 4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등 한인 거주지를 습격했다. 이유는 러시아 혁명군에 대한 보복.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시베리아가 혼란에 빠지자, 일본은 이듬해 4월 이곳에 거류하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했다. 하지만 적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20년 3월 러시아 혁명군이 우수리스크(당시 지명은 ‘니콜리스크’)를 공격해 일본 거류민을 학살하자,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참변을 일으켰다. 

러시아 내전 당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은 러시아 혁명군과 함께, 제정러시아와 손을 잡은 일본군에 맞서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군에 대한 보복의 창이 한인들에게로 향했다. 일본군은 한민학교 등 주요 건물과 가옥들을 파괴하고, 무고한 한인들을 학살했다. 4월참변으로 신한촌에서는 300여 명의 한인들이 희생되었으며, 우스리스크에서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비롯해,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많은 한인사회 지도자들이 사살되었다. 


독립군의 대립과 자유시참변

1920년 6월 28일과 29일, 북간도와 연해주의 대규모 통합부대 편성 과정에서 독립군의 내분이 발생했다. 독립군 부대 간의 충돌로 최소 100명에서 최대 500명에 달하는 독립군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3.1운동 이후 활발한 대일 투쟁을 벌이던 독립군은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이후로 이르츠크파와 상해파로 분열하는 양상을 보였다. 자유시참변은 이 같은 갈등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러시아 내전 종결 후 한인 사회의 시련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었다. 내전 당시 한인독립군은 혁명군과 함께, 제정러시아와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에 참여했다. 일본군과 싸우는 만큼 혁명군의 승리가 조국의 독립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공한 혁명군은 한인독립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러시아 한인들을 집단농장에 배치해, 공산주의 체제에 편입시켰다. 연해주에서 오랜 시간 동안 닦아온 한인들의 기반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항일독립운동가들은 만주지역으로 떠나기도 했다.

 

강제이주의 시작점으로 알려진 라즈돌로예역. 연해주에서 삶을 일구던 한인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황무지에 맨몸으로 끌려갔다.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와 억압의 세월

1931년 만주까지 점령한 일본군은 우수리강을 사이에 두고 연해주의 소련군과 자주 충돌했다. 소련과 일본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연해주의 한인들은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러시아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스탈린의 기획이었다. 일본인과 구별되지 않는 한인이 일본의 첩자 노릇을 한다는 것이 강제이주의 표면적인 구실이었다. 강제이주에 앞서 한인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저항 세력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1937년 9월과 10월, 171,781명의 한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40여 일간 1만 여 킬로미터를 달린 끝에 그들은 낯선 땅에 내던져졌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반사막지대의 건조한 날씨. 극동에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학질과 풍토병. 그곳엔 의료진도 의료시설도 없었다. 한인 의사들은 이미 숙청당한 후였다.  

이주 후 한인들은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전쟁이 나면 군대에 가는 대신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었다. 1938년 스탈린의 특명으로 소련 내 소수민족 언어에서 한국어가 제외되면서 한인에 대한 민족교육도 금지되었다. 국가기관에 취업할 수도 없었고, 사회정치적 진출도 봉쇄되었다. 그러나 억압의 시간 속에서도 한인들은, 황무지를 벼가 자라는 농토로 일궈냈고, 소련 중앙아시아의 모범적인 소수 민족으로 새롭게 일어섰다.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한국의 전통 공연을 선보이는 학생들. 고려인뿐 아니라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다른 민족들도 함께하고 있다.

50여 년간 일군 땅을 떠나... 선조들의 땅으로... 

1991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 해체되고, 신생독립국들이 탄생했다. 이 같은 정세의 변화는 50여 년간 중앙아시아에서 삶의 터전을 닦아왔던 한인들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주었다. 중앙아시아의 신생독립국들이 탈소련화 정책을 펴면서 민족주의와 민족언어정책이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소수민족인 한인들은 또 다른 차별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1993년 러시아 연방 최고회의에서 「러시아 고려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이 채택되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시행된 고려인의 강제 이주와 정치적 탄압이 불법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동안 정치적 탄압과 민족 차별을 받아야 했던 고려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법령이었다. 이 법은 한인들이 연해주로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열어주었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공화국에 거주하는 고려인이 러시아 이주를 희망할 경우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고, 이전의 주거 지역으로 이주할 경우 지방 당국이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며, 주거지와 농장 등을 관련 법령에 따라 기존 주민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알맞게 분배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고려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이 채택되면서 많은 한인들이 50여 년간 일군 삶의 터전을 떠나 선조들의 땅 연해주로 돌아가고 있다. 
 

□ 이 글은 2018년 10월 4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 (사)희망래일 인문학습원 대륙학교 연해주 연수 프로그램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1) 안중근 단지 동맹비 하단에 새겨진 비문이다. 날짜에는 오류가 있다.

참고 문헌: 박환(2013),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 민속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사진  김푸르매(본지 발행인)

김푸르매 기자 gracia0420@seconomy.co.kr

<저작권자 © S.Economy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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